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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좋던 주민들 갈가리 찢겼는데 우예 사노”

14일 오후 경북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345㎸ 송전탑 건설현장 들머리에서 할머니들이 비를 맞으며 공사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지역 쏙] 송전탑 갈등에 평온 깨진 청도 삼평리

경북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는 100명도 되지 않는 주민들이 고추와 마늘 농사를 짓는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이 마을에 송전탑이 들어선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마을 주민들은 찬반으로 나뉘어 몇년째 갈등에 휩싸여 있다. 예전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까.

“평화로운 마을이었는데 송전탑 하나로 주민들이 갈가리 찢기고 이게 뭐야. 한전이고 무슨 단체고 지금은 마을에 있겠지만, 어차피 다 떠날 거잖아. 여기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건 우리잖아.”

지난 13일 오후 4시 경북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경로회관에서 만난 할머니(79)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이 할머니는 문재인 후보를 찍었다고 했다. 송전탑을 만들고 말고는 대통령이 결정할 큰 문제라고 생각해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돼 정권이 바뀌면 마을에 송전탑이 들어서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문재인이 안 되더라고. 뭐 어쩌겠어. 그냥 자포자기하고 송전탑 만들라고 한전에 합의해줬지. 저렇게 반대한다고 지금 뭐가 달라지겠어. 국가가 꼭 필요해서 하는 공사라잖아.” 할머니는 힘없이 말했다.

함께 있던 다른 할머니(81)는 “처음에는 (송전탑) 짓지 말라고 주민들이 싹 다 몰려가고 그랬지. 그러다가 도랑에 넘어져 다치고 그랬어. 그런데 여기만 빼고 다른 데는 다 지어졌더라고. 국가가 하는 일인데 어떡하겠어”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할머니(82)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 송전탑을 짓는 공사를 반대하다가 결국 합의해준 할머니들이다.

경로회관을 나와 삼평리를 남북으로 통과하는 902번 지방도를 따라 남쪽으로 300m를 내려가자 도로 오른쪽에 펼침막이 가득했다. ‘주민에게 결정권을, 삼평리 마을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투쟁은 정당한 것입니다’ ‘삼평리에 평화를, 송전탑 공사를 중단하라’….

‘청도 345㎸ 송전탑 반대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내건 것들이다. 공사장 들머리 양쪽에는 이들이 농성을 위해 마련한 천막이 있다. 공사장 들머리에서는 끝까지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는 할머니들과 공대위 회원들이 23호 송전탑 지중화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고 있다.

공사장 철문에는 ‘출입 금지: 이곳은 국가기간시설을 건설하는 공사 현장입니다. 무단으로 들어오거나 점거 시 형법 제314조에 의거 업무방해죄로 처벌됨을 경고합니다’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바로 아래에는 ‘밀양, 청도 송전탑 공사 중단하고 노후 원전 폐쇄하라’는 표지판이 놓여 있었다.

주민 84명 모두 송전탑 반대하다 
어쩔 수 없이 돌아서 17명만 남아 
한전, 지중화 요구 묵살 강행 
25일 공사 끝내고 철수하면 
찬반 갈등 빚은 주민들만 남아 
공대위 “반대 할머니들 명예 찾을 것” 
한전 “주민 화해 위해 노력하겠다”

공사장으로는 자재를 실은 트럭이 드나들자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는 할머니들과 공대위 회원들이 트럭을 막아섰다. 경찰, 한국전력 관계자들과의 충돌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할머니 몇명은 손등이 찢어지는 등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날 마찰은 마지막 공사 차량이 들어간 오후 5시30분에야 잦아들었다. 할머니들과 공대위 회원들은 공사장 들머리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시위를 이어갔다.

백창욱 공대위 공동대표는 “곧 공사가 끝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전은 송전탑을 지중화해 달라는 요구에도 이해할 만한 설명 없이 이런 식으로 공사만 강행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억조(74) 할머니는 “보상은 10원도 필요 없다. (송전탑을) 땅으로 묻든지 고마 치아뿌든지 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전 계획대로라면 송전탑 공사는 오는 25일 끝난다.

주민이 100명도 되지 않는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가 이렇게 시끄러워진 것은 한전이 청도를 포함한 경남·북 16㎞ 구간에 345㎸ 송전탑 40개를 건설하는 사업을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부터다. 이 사업은 울산 신고리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를 전력 수요가 많은 대구에 공급하기 위해 경남 창녕군 북경남변전소에서 경북 경산시까지 송전탑을 건설하는 것이다.

2009년 이 마을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마을에 23호 송전탑이 들어선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송전탑 건설에 반대했다. 하지만 주민 84명 가운데 하나둘씩 “어쩔 수 없다”며 찬성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결국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은 17명만 남았다. 반대농성에 빠지지 않고 꾸준히 참가하는 주민은 6명 정도로 줄었다. 다른 송전탑을 건설하는 지역에서도 반대 움직임이 있었으나, 주민들이 보상에 합의하면서 큰 마찰 없이 공사가 진행됐다.

하지만 2012년 7월 한전이 40개 송전탑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하자 주민들의 반대농성도 다시 거세졌다. 끝까지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던 주민 17명의 투쟁에 대구환경운동연합 등 환경단체와 인권단체가 결합하면서 반대운동은 더욱 힘을 얻었다. 결국 공사는 2012년 9월 중단됐고, 이듬해 3월 40개 단체가 공대위를 꾸리고 본격적으로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을 펼쳐나갔다. 한전 대구경북건설지사 들머리에서 기자회견과 집회를 잇따라 열어 송전탑 건설 중단을 요구했고, 대구 중구 한일극장 주변에서도 송전탑 건설 중단을 요구하는 시민문화제를 열었다.

그러자 한전은 지난해 11월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 17명과 환경운동가 6명을 상대로 법원에 공사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대구지법 민사20부(재판장 손봉기)는 지난 2월 한전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국민의 편익과 복리 증진을 위한 공익사업으로, 국가 전체적인 전력수급계획에 따라 해당 지역에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공사인데 장기간 공사가 중단되면 해당 지역 전력 공급 차질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주민과 환경단체는 “송전탑 건설 과정에서 환경영향평가 및 주민설명회를 제대로 거치지 않는 등 절차를 위반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소명자료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당 주민과 환경운동가들은 공사를 방해하면 1명당 하루에 20만원씩 한전에 물어줘야 한다.

지난 7월3일 경북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주민들이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농성하고 있다. 청도/정용일 <한겨레21> 기자 yongil@hani.co.kr

한전은 공사 중단 22개월 만인 지난달 21일 새벽 5시 공사를 재개했다. 반대 주민과 공대위 회원 등 70여명은 지중화 등을 요구하며 공사장 입구를 막아섰다. 하지만 한전 직원 등 150여명은 중장비를 동원해 울타리를 쳐놓고 터파기 공사를 시작했다. 경찰도 500여명이 투입됐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19명이 업무방해나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이르면 23일께 한전은 송전탑 공사를 끝내고 현장에서 철수할 예정이다. 경찰도 조만간 병력을 철수시킬 방침이다. 마을에는 주민들과 공대위 회원들만 남게 된다. 청도군에서는 공대위 쪽에 도로 통행에 지장이 된다며 농성천막 철거를 요구한 상태다.

주민들은 송전탑 건설에 합의한 사람과 끝까지 반대한 사람으로 나뉘어 심한 갈등을 빚어왔다. 한전이 마을에 송전탑 건설 합의를 조건으로 준 발전기금을 놓고 주민들끼리 고소하는 일도 있었다. 그 갈등과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김제남 정의당 의원이 중재에 나서 한전 쪽에 주민공청회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한전의 거부로 무산됐다. 그러자 공대위는 지난 13일 보도자료를 내어 “우리는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할머니들의 뜻에 따라 농성을 완강히 계속할 것이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공사를 막기 위한 투쟁을 이어갈 것이다. 이후 모든 사태의 책임은 공청회마저도 거부한 한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라”고 밝혔다. 공대위는 청도 송전탑 문제 해결을 위해 정치권·종교계와 접촉하고 있다.

변홍철 공대위 집행위원장은 “한전은 진심어린 사과와 일시적인 공사 중단 및 지중화 논의 등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계속 남아서 반대투쟁을 이어가며 마을 공동체 복원을 위해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전 관계자는 “공사가 저렇게 진행된 상황에서 지중화는 어렵고 공식 사과한다는 것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도 마을 주민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공대위와도 언제든지 협상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했다. 한전은 최근 막판 합의를 위해 공대위 쪽과 접촉하고 있다.

매일 저녁 어둠이 찾아오면 공대위 회원들과 할머니들은 농성천막 안에서 함께 밥을 먹고 노래도 부르며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고 있다. 하지만 송전탑이 세워진 뒤, 이 할머니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는 지금 아무도 모른다.

청도/글·사진 김일우 기자 cooly@hani.co.kr

Posted by 이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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