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예‘술’제 

- 모든 것은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났다.



박인화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활동가)







삼평리 프로젝트 팀에 대한 이야기는 현순쌤과 민수오빠랑 함께한 술자리에서 처음 들었다. 삼평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삼평리의 이야기를 가지고 저항예술제에 참가한다했다. 삼평리에서 만난 사람, 삼평리로 연결되는 사람들이 모여 삼평리의 이야기를 퍼포먼스로 하는 거라 했다. 나는 작년 크리스마스 대백 앞에서 했던 불법인간 팀으로 참가하고 싶었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무산됐었다. 솔깃했지만 내가 맡고 있는 일에 대한 집중력과 책임감이 많이 요구되던 때라 현순쌤이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술이 술술 들어가고 오늘이 어제가 됐을 때 쯤 술김에 하겠다 했다. 술 깨고 나서 조금 후회하긴 했지만 어쩌겠나. 이미 하겠다한 걸 주워 담을 수도 없는데.



삼평리프로젝트 팀은 사부작에서 처음 모였다. 각자가 표현하고 싶은 삼평리의 이미지를 나누고, 삼평리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 했다. 우리는 삼평리 할매들의 얼굴을 하고 농성장 뒤편에 꽂힌 송전탑을 어깨에 메고 우리가 그렇게 지키고자 한 삼평리 평화공원을 따라 활짝 핀 접시꽃을 손에 들기로 했다. 정해진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걸어다니고 밥을 먹고 앉아 쉬고 대화를 나누고 숨을 쉬는 것 조차도 퍼포먼스라 생각하기로 했다. 탈은 찰흙으로 본을 떠서 석고나 종이로 만들기로 했다. 근데 어깨에 멜 송전탑을 어떻게 구현해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메고 다녀야하는데 무거워도, 쉽게 부러져도 안되기 때문에 어떤 재질로 만들어야 할지 너무 고민스러웠다.



-2015저항예술제에 참가한 '삼평리 프로젝트팀'



작년과 마찬가지로 생일은 삼평리와 함께했다. 작년엔 도청에서 치킨먹고 다음날에 도자사한테 생일 빵을 맞았는데 올해는 도도에서 종일 탈과 송전탑, 접시꽃을 만들었다. 탈은 쓱싹하고 빚으니 뚝딱하고 나왔고 접시꽃도 철사를 요리조리하니 틀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송전탑이었다. 처음엔 죽부인 대나무를 구해 만들기로 했는데 부러질 위험도 있고 구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고추가 자랄 때 지지해주는 고추대로 송전탑을 만들었다. 무게도 가볍고 휘지도 부러지지도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민수오빠는 사일 밤낮으로 송전탑을 만들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민수오빠가 잘 하길래 마음만 보탰다. 저항예술제 전날 새벽까지 열심히 만들더라. 내가 마음을 보태서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저항예술제가 열리는 성남 하수종말처리장 오리공원에 갔다. 하수종말처리장답게 분위기가 스산했다. 우리가 조금 일찍 도착해서 그런지 준비가 조금 덜 되 있었다. 실어온 송전탑을 마저 조립하고 장소를 둘러봤다. 저항예술제 플랑이 입구에 걸려있고 저항하고 있는 지역의 메시지가 담긴 플랑이 쭉 걸려 있었다. 저항예술제스럽단 생각과 삼평리의 이야기를 한다고만 했지 나는 저항예술제에 뭘 저항하러 왔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저항예술제에 있으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생각하길 저항했다는 것에 잠시 뿌듯했다. 우리는 탈을 쓰고 송전탑을 단단히 메고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공연 하는 곳에 가서 춤도 추고 퍼포먼스도 보고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기도 했다. 정말로 우리가 즐기고 앉아있고 돌아다니는 것이 퍼포먼스가 되었다. 탈을 쓰고 다니는 것에 어느 정도 적응되니 술이 땡겼다. 주최측에서 나눠준 대안화폐로 맥주를 사먹기 시작했다. 탈 밑으로 빨대를 넣어 쪽쪽 빨아먹으니 한 캔이 금방 동났다. 그렇게 하루 종일 맥주를 마셨다. 공짜 술이라 좋았고 술을 마시는 것 조차 퍼포먼스라 생각하니 더 좋았다. 하루종일 마셨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퍼포먼스는 오리공원 입구에 설치된 동상 앞에서 예기플러스 팀이랑 부산 극단에서 걷기 퍼포먼스를 하는 팀이랑 한 퍼포먼스다. 약속된 동작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이 이끄는 대로 퍼포먼스를 하고 합을 맞췄다. 지나가는 사람이 발걸음을 멈춰 짧은 눈길을 주고 다시 떠나도 괜찮았다. 각자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그대로 동상 앞에 가져왔다. 성남시 하수종말처리장 앞 동상이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삼평1리가 되었다. 걸어가는 할매,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할매, 한전 직원들과 싸우는 할매, 꽃을 꺾어주는 할매, 너무 지쳐서 누워있는 할매, 가만히 바라보는 할매. 누군가의 손을 쓰다듬는 할매. 우리는 삼평리 할매가 되었다. 



마지막 공연은 스님한분과 퍼포머 이정훈씨, 예기플러스 팀, 삼평리 프로젝트 팀이 함께 했다. 장소가 좁고 퍼포머가 많아 할 수 있는 게 적었다. 아쉬운 마음에 공연이 끝나고 길바닥에 앉아 남은 저항화폐로 산 맥주를 나눠 마셨다. 1박 2일 저항예술제가 끝났다. 삼평리에서 춤 추기 싫어 삼평리대책위 상황실 일반노조 까지 만들었는데. 내가 사람들 앞에서 삼평리 이야기를 몸짓으로 하다니 놀라웠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춤은 안췄을 것 같지만. 



저항예술제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저항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무엇에 저항했을까. 송전탑을 주민들 동의 없이 국책사업이란 이름으로 막무가내로 세워버리는 정부에 저항했는가. 무력으로 주민들과 연대자들을 제압한 경찰에게 저항했는가. 나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무엇에 저항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삼평리를 알아달라고. 아직 싸우는 사람이 있다고. 아직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잊혀지는 것에 저항했다. 우리는 싸움이 가열찬 순간에만 그곳에 사람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시간이 지나 눈에 보이는 충돌이 사그라들면 너무 쉽게 잊혀진다. 나 또한 삼평리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대구로 돌아와 생활을 할 때 삼평리를 잠시 잊어버린 적이 있다. 바쁘니까, 내 일이 너무 많으니까, 몸이 멀어졌으니까, 누군간 잊지 않고 있겠지란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삼평리 프로젝트 팀을 준비하고 저항예술제에서 퍼포먼스를 하면서 나에게 삼평리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저항예술제 마지막날 맨발로 아스팔트를 걸어다닐 때 그 뜨거운 아스팔트 도로가 생각 났다. 그 열기가 저항의 불씨가 되어 수백명의 연대자와 주민들이 모여 삼평리 송전탑 투쟁했다. 우린 체감온도 50도가 넘는 그 거리에서 춤 추고 노래하고 함께 싸웠다. 누군가는 이미 졌다고 말했지만 아직 지지않았다고 꿋꿋하게 말했었다. 정말 아직 지지않았다. 주민들은 마을복지회관 건립을 막으려고 다시 도로위로 나갔다. 찾아오는 사람 드물고 마을 공동체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싸움이 끝나지 않았으니 질 수가 없다. 잊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의 저항은 계속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우리의 투쟁도 계속된다. 삼평리에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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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문부여사건 최종진술


백창욱(청도345kv송전탑반대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그동안 삼평리 할매들은 세 번의 전쟁을 겪었습니다. 할매들은 3차 대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2012년 7월 23호 송전탑 1차 공사 때 입니다. 한전이 고용한 멧돼지용역들이 할매들에게 반인륜적인 폭력을 가했습니다. 한 예로 용역들은 실신한 이차연할매를 산에서 질질 끌고 내려왔습니다. 게다가 병원에 모셔가기는커녕 방치했습니다. 그 때 일은 할매들에게 깊은 트라우마가 됐습니다.


둘째는 한전이 2014년 7월 21일 삼평리에 새벽침탈한 이후입니다. 
할매들은 송전탑이 세워질 때까지 현장에서 일상을 보내야 했습니다. 편안한 일상이 아니라 매일매일 아수라장 속에 구급차에 실려나가고 인간의 밑바닥을 겪었습니다. 국책사업 미명 하에 공권력과 한전이 합작하여 삼평리를 유린하는 것을 꼼짝없이 지켜봐야 했습니다.
일차 전쟁 트라우마가 치유는커녕 더욱 덧나고 말았습니다.


셋째는 지금 진행중인 전쟁입니다. 
한전이 마을분열책으로 삼평리에 준 돈으로 이장은 투명한 절차없이 복지회관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 돈은 할매들과 주민들이 온 몸으로 반대활동을 한 결과로 다른 마을보다 세 배나 많은 돈입니다. 그러나 이장은 할매들의 고통에 대한 인정과 사과없이 회관을 발주했습니다. 공사업자는 흙차를 막는 할매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가했습니다. 
할매들은 지금도 복지회관 터 앞에서 땡볕 아래 돗자리 하나 깔고 동의없이 밀어붙이려는 복지회간 공사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무 잘못없는 70-80대 할매들은 한전의 잘못된 일처리로 인해 말년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으며 하루하루 고단하게 살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한전은 물론이고 이장과 공사업자까지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해 할매들을 끝없이 벼랑으로 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할매들은 너무 많은 고통과 댓가를 치뤘습니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여기에 더 이상 어떤 법적제재를 가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체적 진실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2014년 3월 1일 장승을 세운 일은 삼평리 평화를 갈망하는 하나의 문화행사일 뿐입니다. 도대체 무생물 장승이 무슨 공사방해를 한다는 말인가요? 또한 삼평리 할매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연대한 대책위 일꾼들에게 금전압박을 하는 것은 약자를 돕고 함께 살아야 하는 우리 사회 공동체 가치와 민주주의에도 위배됩니다. 


판사님, 할매들이 지금까지 겪은 참혹한 상황에 대해서 충분히 검토하시어, 한전이 제기한, 실체도 불분명한 이행강제금에 대해서 기각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이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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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창간사] 


더 너른 연대를 소망합니다. 



성빛나(민주노총 경주지부 조직2부장)


[편집자주] 성빛나씨는 현재 민주노총 경주지부에서일하고 있다. 빛나씨에게 창간사를 부탁한 이유는 그가 삼평리의 많은 이바구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2014년 7월 21일, 갑작스레 공사가 강행된 지 얼마나 지난 뒤였을까. 우리는 공사장 앞에서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촛불집회를 열었고 그 집회의 이름을 '삼평리 이바구'라 불렀다. 빛나씨는 '삼평리 이바구'를 매일 준비하고 사회를 보았다. 촛불집회에서 뉴스레터까지 이어지는 '삼평리 이바구'는 빛나씨에겐 조금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 매일 저녁 7시 30분, 공사장 정문앞에서 진행되었던 삼평리이바구 웹포스터




- 2014년 8월 1일, 삼평리 이바구 사회를 보고있는 성빛나씨 




보나씨로부터 <삼평리 이바구> 뉴스레터 창간사를 부탁받은 뒤 지난 며칠동안 삼평리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한여름 날씨에 먼지를 뒤집어쓰며 경찰, 한전직원들과 전쟁같은 날들을 보냈던 기억보다 어쩐지 물안개가 피어오르던 삼평리의 고요한 아침풍경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농성장에서 먹었던 나물비빔밥에 자작하게 지진 된장찌개도 생각났습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작고 사소한 기억들이 있습니다.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작은 단추로 아기자기하게 수선해서 쓰고 다니셨던 이어댁할머니. 사이좋은 사슴벌레 한 쌍을 미소 띤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나동댁할머니. 단발머리를 짧게 자르고 뽀글머리 파마한 게 어쩐지 쑥스러워 보이던 월배댁할머니. 웃을 때 반달눈이 되는 천사 같은 석동댁 할머니. 시장에서 물고기 판 실력이 고스란히 입담으로 나오셨던 부산댁 할머니. 대식구 뒷바라지에 청춘을 보냈던 그 한들을 쏟아내기라도 하듯 노랫자락 뽑아내시던 가촌댁 할머니. 몸살인 상태로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이어댁할머니 양파밭일을 도왔던 이은주 전 부녀회장님...



핵발전소를 막아내고 핵마피아를 몰아내자는 투쟁의 의미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실은 저의 마음속에는 이런 작은 듯 사소해보이는 풍경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켜내지 못했던 잔인한 나날들이 계속되었지요. 온몸을 다해 공사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깁스를 하고도 계속 꿋꿋한 얼굴로 투쟁을 이어나가셨던 소골댁할머니, 실신해 응급실에 실려가면서도 "우리 아들은 알면 안 된다"며 우시던 석동댁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필사적인 고투에도 불가항력인 양 송전탑이 서서히 올라갈 즈음, "저것만 보면 눈에 가시가 들어간 것 같이 아파."하고 중얼거리던 이어댁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눈물 젖은 목소리로 송전탑 앞에 울러 퍼지던 ‘고향의 봄’이 있었습니다.


- 2014년 8월 1일 진행된 삼평리 이바구


연일 할머니들은 병원에 실려갔고, 공사를 저지하기 위한 인원은 경찰과 한전 직원의 수에 비해 턱없이 적었습니다. ‘공사를 끝내 막을 수는 없는 것일까’라는 무기력과 할머니들에 대한 걱정으로 우리의 투쟁이 기로에 놓였던 때이지요.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연대해줘서 고맙다’며 ‘끝까지 싸우겠다’는 할머니들 덕분이었습니다. 투쟁의 동력이 너무도 굳건했던 것입니다. 또한 수많은 동지들의 연대는 투쟁의 자양분이었습니다. 온몸으로 공사를 저지하느라 연행되기 일쑤였던 연대동지들과 매일 농성장 앞에 솥을 걸고 밥 연대를 해주셨던 수많은 연대단위들이 있었습니다. 종교단체에서는 기도회와 미사로써, 예술가들은 공연으로 투쟁에 함께 했고 삼평리 소식을 세상에 알려내고 소중한 기록으로 남겨준 기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연대자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싸우자’는 마음으로 매일 저녁 삼평리에 연대오는 동지들과 공사장 앞에서 촛불을 켜고 삼평리 소식을 공유하고 연대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삼평리 이바구>를 열게 됐습니다.



아직, 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여름, 삼평리의 낮과 밤에 함께했던 수많은 연대자들이 공안탄압에 의해 붙잡혀가고 실형을 선고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6월 9일 최창진동지가 ‘공무집행방해방해’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구속됐습니다. 이 동지에 대한 구속선고는 민중생존권, 민주주의에 대한 사망선고이며 공안탄압이자 국가폭력입니다. 저들은 그러나 핵마피아에 맞서 마을 공동체와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까지 가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마음들을 나누던 자리가 공사장 앞 촛불을 태우던 <삼평리 이바구>에서, 이제 온라인 뉴스레터 <삼평리 이바구>로 옮겨갑니다. 더 너른 연대를 소망해봅니다.

Posted by 이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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